강동환기자 기사입력  2020/12/29 [19:01]
하동 쌍계사 여행기
선우 유진숙 (시인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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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긴 휴가가 생겨서 친구들과 함께 경남 하동 쌍계사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서부 경남 쪽이지만 다행히 부산발 순천까지 운행하는 새마을호 기차가 있어서 친구들은 들뜬 마음으로 물금읍으로 향하였다. 기차가 자주 없어서 조금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다. 한 시간을 기다려 오전 11시 3분에 기차에 몸을 실었다. 코로나 때문에 요즘에는 기차 속에서 마스크 착용 안 하면 승차할 수가 없었다. 또한 기차 속에서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목이 타도 기다려야 한다. 내릴 때까지 꾹 참아야 한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기차 속 풍경이다. 음식은 꺼내서 절대로 먹을 수 없는 진풍경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은 황금같다. 온통 울긋불긋 단풍 물이 들어 한 폭의 산수화를 바라보는 것 같다. 그냥 묵묵히 같은 자리에 앉아도 창밖만 바라보며 오랜만에 해보는 기차 여행은 마스크 착용으로 가까운 사람과도 대화가 단절되는 체험을 하였다. 현실에 순응하며 풍경에 눈과 마음이 닿아 마음속에 가을이 홍시처럼 익어가고 있었다. 

 

 

 

 

2시간을 달려 하동역에 도착하였다. 새로 만들어져서인지 깨끗하였다. 외각으로 터미널과 기차역이 가까이 있어서 시민들이 움직이는 것에 시간을 절약 할 수있어서 좋았다. 터미널에서 하동 쌍계사 가는 버스를 탔다. 시골이라 사람도 많이없는데다 코로나 거리두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안보여 더 설렁한 느낌이 들었다. 버스 속에는 젊은 사람이 없고 거의 노인들뿐이어서 그런지 버스 안내양이 어르신 짐도 실어주고 내려주는 친절한 도우미 모습을 보았다.

 

 

 


  올해는 하동이 큰 어려움을 당하였다. 여름 태풍으로 섬진강 물 수위가 높아서 땜문을 열어 물을 방류 하는 바람에 구례 쪽과 하동 쪽 사람들 수해를 입었다고 시골 아주머니가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내 눈으로 그곳을 확인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마음이 아플까란 생각이 들었다. 경자년 해에는 이중삼중 고통이 하동 주민들에게 닥친 불행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주민들은 부지런하게 빨리 삶의 터전을 회복하여 상인들은 가계 문을 열고 농부는 농작물에 신경 쓰는 모습이 여행중에 눈에띄었다. 버스는 달려 우린 목적지 쌍계사 버스 정거장에 하차하였다.

 

 

 


  지나오면서 바라본 하동쌍계사 십리벚꽃길은 울긋불긋 단풍잎으로 곱게 물이 들어 가을이 곱게 익어가고 잎새들은 갈바람에 푸른 하늘 높이 춤을 추며 외부에 오는 손님을 환영하듯 공중높이 춤을 춘다. 길가에 핀 들꽃 나지막이 서서 꽃향기 풍기며 하동의 특산품 녹차 나무들이 가지런히 놓여 차 茶의 고장답게 깔끔하게 정비되어 진녹색으로 잘 자라고 있었다. 바라만 보아도 눈의 피로가 싹 달아났다. 화계장터에서 한 시간 달려 목적지인 쌍계사 팻말이 보였다. 지천명 되어도 마음은 18세 소녀처럼 설렘은 여전하다.

 

 

 

 

 


  쌍계1 다리를 건너 쌍계사 들어가는 입구에 아름드리 노란 물이 든 은행나무가 중앙에 턱 버티고 서있다. 우린 먼저 점심시간이 늦었지만, 식당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식탁이 부러지듯 음식들이 많이 나왔다. 출출하여 동동주와 버섯전을 먼저 시켜서 우정의 건배 잔을 나누고 식사를 하였다. 하동사람의 인심이 후덕함을 느꼈다. 우리팀은 자리를 떠 쌍계사로 걸어 올라갔다.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예전에는 이곳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가장 붐비는 시기인데 한적한 분위기가 코로나 영향이 크다는 걸 피부로 느껴졌다.

 

 

 

 

 


  쌍계사 생긴 유래부터 알아보고 싶었다. 해동 선율 종 대가람 '쌍계사' 라고 새겨진 쌍계사 초입의 석주 쌍계사는 사찰이 산을 따라 지어졌는데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전각들이 배치되어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사찰이다. 규모는 상당히 큰 사찰이다. 쌍계사(雙磎寺)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에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로서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께서 선종(禪宗)의 六曹이신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 맥을 이어 귀국하신 헤소 진감(眞鑑)선사께서 퇴락한 삼법 스님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시어 선의 가르침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시었으니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렸다. 그간에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고산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색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쌍계사는 국보 1점(진감국사 대공 탑비-국보 47호), 보물 3점 (대웅전-보물 500호, 쌍계사 부도-보물 380호,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925호)의 국가지정 문화재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청학루, 마애불, 명부전, 나한전 등의 많은 문화유산과 칠불암, 국사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조계종 25개 본사 중 제13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쌍계사는 여러 문화 재외에도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쌍계사 입구 근처에는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가 있고, 회개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벚꽃길에도 '차시배지(茶始培地)' 기념비가 있다.

 

 

 

 

 차는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여왔는데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金大簾)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가 부근에 차밭을 조성, 보급하였다고 한다. 현재 혜능대사의 정상이 모셔진 금당(金堂)에 금당선원이 있어 눈푸른 남자들의 정진이 이어지고 있으며 전통강원(傳統講院)과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설치되어 바야흐로 선맥과 강맥, 그리고 율맥의 법통이 바로 선 수행도량의 명성을 떨치고 있다.

 

 

 

 

 

 

쌍계사의 가람배치도 일주문은 속세를 떠나 불도에 들어서는 첫째 관문으로서 양쪽에 기둥 하나씩을 세워 만들었다 하여 일주문이라 하는데 항상 한마음 한뜻으로 수도 정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벽암 스님이 조선 인조 19년(1641년)에 조성하였고 1977년 고산스님이 중수하였다. 건축양식은 다포식(多包式)으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는데 내외4출물로 되어 있다. 공간포(空間包)에는 정면에 3구 측면에는 2구가 놓여져 포(包)간 격은 일정하다.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가 없이 창방(昌枋), 평방(平枋) 위에 대접 받침을 놓고 포를 설치하였다. 금강문 이 문은 신라 문성왕 2년(840년)에 진감선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인조 19년(1641년) 벽암 스님이 중창, 1979년 고산스님이 중수한 것이다. 건축양식은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익공식이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양측 박공에는 풍 판을 달았다. 정면 어간을 개방하고 양측간을벽체로 막아 금강문이나 사천왕문의 일반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다.

 

 

 


  문안에는 금강역사를 모시고 있다. 금강역사는 부처님과 불법, 스님들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여 불교를 수호하고 악에 철퇴를 내리는 천신이다. 왼쪽에 계신 분이 밀적금강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이다. '금강문'이라는 편액의 글씨는 벽암 스님의 글씨이다.

 

 

 

 

 

 

천왕문은 사천왕을 봉안한 문이다. 사천왕은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수도하는 스님들과 선인(선인)을 돕는 네 분의 신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주를 다스리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주를 다스리는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주를 다스리는 증장천왕(增長天王),북주를 다스리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의 네 분이다. 신상은 목조이며 뛰어난 조성법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조선 숙종 30년(1704년) 백봉 스님이 창건하였고 순조 25년(1825년) 인정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그 뒤 1978년 고산스님이 다시 중수하였다. 건축양식은 단층 맞배기와 집 막 익공식(翼工式)이며, 금강문과 같이 양측 박공면에는 풍 판을 달았으며 중앙 어간은 개방하고 양측간은 벽체로 마감하였다. 천왕문의 뒤쪽 모습은 구층석탑 고산스님이 인도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 삼과(三顆)와 산 내 암자인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이과(二顆)와 전단 나무 부처님 일위(一位)를 모셨다. 때마침 발심 서원한 백창기 부부의 단독 시주 불기 2531년(1987년) 1월 3일 시공하여 불기 2534년(1990년) 3월 15일 완공하였다.

 

 

 

 

 

 

 

 

 

 

경종루에는 사찰에서 사용하는 4가지 악기 중에 3가지 악기가 있다. 범종, 법고, 목어가 그 3가지 악기이다.범종은 절에 달린 큰 종으로 범종은 의식이나 행사 때 또는 대중을 모이게 하거나 때를 알리기 위해서 친다.범종의 신앙적 의미는 모든 중생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생겨 악도(지옥`아귀`축생)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지옥 중생까지 제도하는데 있다. 이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는 지옥의 고통도 쉬는 시간이라고 한다.

 

 

 



  새벽 예불 때에는 28번을 치는데 욕계6천, 색계18천, 무색계4천의 하늘나라 대중에게 부처님의 도량으로 모이라는 뜻이 있고, 저녁 예불 때에는 33번을 치는데 33천의 하늘 문을 여닫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108번을 타종할 때는 108번뇌를 타파하고 무간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부처님의 음성이라고 하는데 큰스님의 입적하였을 때에만 지금은 치고 있다고 한다. 법고 사찰에서 사용하는 북을 말하는 것으로 큰 북이 있고 적은 북이 있는데 큰 북은 조석 예불 때에 치게 되고 적은 북은 염불 의식 때에 많이 사용한다.

 

 

 

 



  조계종에서 이 적은 북은 많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이 북은 소가죽을 사용하여 만드는데 암소가죽과 숫소가죽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음양의 조화라고 보면 된다. 이 북을 치는 이유는 축생들의 제도를 위해 치는 것이란다.목어에는 더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이 비게 파내어 안쪽의 양 벽을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법구로서 수중 생물(물고기 등)을 제도하기 위해 사용한다. 게으른 수행자들을 경책하기 위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 옛날에 어느 절에 높은 스님이 제자 몇 사람을 가르치며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힘써 도를 닦았으나, 유독 한 제자만이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제멋대로 생활할 뿐 아니라 계율에 어긋나는 속된 짓을 저지르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 제자는 몸 쓸 병에 걸려 일찍 죽고 곧바로 물고기의 인과응보를 받아 태어났다. 그것도 등에 커다란 나무가 솟아난 물고기가 되어 헤엄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풍랑이 칠 때마다. 나무가 흔들려 피를 흘리는 고통을 감수하여야만 하였다. 하루는 그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난 물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슬피 우는 것이었다. 스승이 깊은 선정에 들어 물고기의 전생을 살펴보니 그 물고기가 바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일찍 죽은 자신의 제자였다. 가여운 생각이 든 스승은 곧 그 제자를 위하여 수륙재(물이나 육지에 사는 미물과 외로운 영혼을 천도하는 법회)를 베풀어서 물고기의 몸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물고기의 몸을 벗은 제자가 나타나서 감사와 함께 서원을 말했다.

"스승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바라옵건대 저의 등에 난 나무를 베어 저와 같이 생긴 물고기를 만들어서 나무막대로 쳐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가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강이나 바다에 사는 물고기가 그 소리를 들으면 해탈 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이 될 것입니다." 스승은 그 부탁에 따라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을 딴 목어를 만들어서 모든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였다.

 



  이 설화는 내용이 약간 차이가 있음을 밝혀 두며 이 목어는 처음에는 식당이나 창고 등에 걸어두고 오로지 대중을 모으는 데만 사용하였지만, 지금은 조석 예불 때에만 치고 있다가 한다.이것이 지금은 변하여 목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목탁은 이 목어가 변형된 것 본래 물고기는 눈을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다고 하여 수행자로 하여금 자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본 경종루 쌍계사의 대나무들 먼저 청학루는 쌍계사 팔영루와 더불어 금당 일원 전각들의 관문 역할을 한다. 형태 및 구조는 삼층 목조기와 맞배집으로 정면향(정면향)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고려 공민왕 6년(1357년)에 진정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인조 19년(1641년)에 벽암선사가중건하였고 1978년 고산스님이 중수하였다. 팔상전의 내력을 알려주는 안내판 팔상전은 고려 충렬왕 6년(1290년) 진정국사가 창업하여 조선 세조 12년(1466년) 선비 대사가 중수하고 숙종 4년 (1678년)에는 천봉선사가 순조 임금 때에는 화악선사가 중수하였으며 1978년 고산스님이 다시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기둥 위로 평방을 돌리고 기둥 위와 그사이에도 공포를 배치한 자료에 양식의 팔작집이다. 공포는 외 3출목 내 4출목을 두었는데 외부제공(外部諸工)의 끝은 장식조각이 없는 강직한 쇠서로 되었고 내부는 모두 교두형으로 되었다. 내부 불상 위로는 간단한 닷집을 두고 그 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비교적 다출목의 공포를 결구하여 내부가 높직하게 보이나 단순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세부에서 일부 장식적인 조각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금당 건물 내에는 중국 선종의제6대조인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정상(頂相) 즉 머리가 있다. 신라 성덕왕 때 당나라의 혜능대사를 만나 보는 라에 유학했을것이 원이었던 삼법스님이 당나 때에는 혜능대사가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으므로 그의 무덤을 찾아 머리를 모셔와 돌로써 만든 석감(石龕)을 넣어 이곳 땅 밑에 안치했다는 것이다. 그 후 신라 민애왕 때 진감선사가 건물을 세워 육조영당(六祖影堂)이라 이름했으며, 현재 석 감에 세워져 있는 7층 석탑은 1800년대에 주변에 있던 목압사의 석탑을 용담 스님이 옮겨와 세운 것이며, 이후부터 육조정상탑으로 불렸다.

 

 



  현재의 건물은 1979년 중수된 단층의 목조기와집으로 다포의 팔작지붕이며 화려하게 단청되어 있다. 정면에 걸려있는 현판은 조선 시대의 또한 쌍계사의 매화들이 피어나 봄 외부인을 살피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대문 장식이다. 대웅전은 진감선사가 신라 문성왕 2년(840년) 창업한 이래 조선 인조 19년(1641년) 벽암 각성스님의 중수, 숙종 21년(1696년) 백암 성총스님의 중수 영조 11년(1735년) 법훈스님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에는 세분의 부처님이 계신대 중앙이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이고 좌측이 아미타불, 우측이 약사여래불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 기와집이다. 막돌 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외 3출목 내 3출목으로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 평방 위에도 짜올린 다포식이다. 첨차는 교두형이고 살미첨차의 바깥끝은 쇠서로 되었고, 안쪽은 교두형으로 되어 있어 건실한 짜임새를 이루고 있다.

 

 



진감선사 대공 탑비의 내력을 알려주는 안내판 진감선사 대공 탑비는 신라 정강왕이 신라말의 고승 진감선사 혜소(774년~850년)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양모 하여 대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玉泉寺)를 쌍계사(雙磎寺)로 명명하고 건립한 것으로 고운 최치원(857-?) 이 비문을 짓고 환영 스님이 각자 하여 887년에 건립되었다. 대사의 속성은 최 씨고, 시호는 진감선사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애장왕(哀莊王) 5년 (804년) 불도를 닦으러 당나라에 들어가 신감대사 (마조도일의 80대 제자로 남종선의 선사) 밑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 후 숭산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종남산에 들어가 3년간 더 도를 닦았다.

 

 

 

 

 

 

 



  흥덕왕 5년(830년)에 귀국하여 상주(尙州) 모악산 장백산(長栢山)에서 선을 가르쳤다. 다시 지리산 화개곡에 들어가 옥천사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대사는 범패에 능하여 그 맑은소리로써 대중을 널리 교화하였음은 유명하다. 비문의 자경은 2.3cm의 해서이다. 이 탑비는 귀 부와 이수 및 비심을 완전히 갖추고 있으며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가운데 하나이다. 귀부의 등에는 간결하게 귀갑문이 조각되었으며 귀두는 용머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귀갑의 중앙에는 방형의 비좌가 마련되어 비신을 받게 되었는데 네면에 운문(雲紋)이 양각되어 있다.



  혼자 호기심이 많아서 사찰에서는 혼자 쌍계사 구경을 마치고 기념사진도 담고 사찰에 대한 정보 역사 등등 수집을 하고 해설 글 읽으면서 쌍계사에 대한 추억을 가득 담았다. 조용하니 더 좋았다. 늘 티브이로만 보고 사람들 입을 통해서만 들었던 쌍계사 여정은 사색에 잠긴 잠자는 공주처럼 조용히 지나 숙소가 정해진 송이 펜션으로 여장을 풀었다. 조금 시간이 나서 주인장께서 꼭 보여주고 싶은 거북바위 하나를 구경하라 하여 우리 일행은 잠시 바위 쪽으로 갔다. 집 뒤 터에 자연으로 빚어진 큰 바위가 거북 형상으로 놓여있었다. 난 무병장수 기도로 거북이와 입을 맞대며 사진 속으로 추억을 남겼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이튿날은 요즘 트롯맨 대세다. 하동이 낳은 정동원 음악천재 소년 정동원 길을 가기로 하였다. 대중교통이 없어 좀 불편하였지만, 일단 택시를 타고 이동하였다. 역시 많은 사람이 마스크 착용을 하고 관광 온 것이 보였다. 정동원 군의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공연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 할아버지가 담군 많은 약초 담근 술이 진열해 놓아 있고 동원군이 연습하던 악기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어린 학생이지만 천재성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얻어지는 땀의 열매가 아닌가 싶다. 미스터트롯맨들의 사인도 있어서 더욱 기분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임영웅 사인이 걸려있어 두 배 기쁨이 느껴졌다. 추억과 역사는 만들어 가는 것 같아 이번 하동 여행길은 색다른 역사 공부가 아니었나 싶고 그저 왔다 가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 없어도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베풀면서 살아가는 큰 교훈을 얻으며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힐링 시간이 아니었는가 싶다.

 

 

 

 

 

 

 

 

 

 

 

 

 

 

 

 

 

 

 

 

 

 

 

 

 

 

 

 

 

 시인  유진숙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수학

 청옥문학 시부문 등단(2013년)

 청옥문학 수필부문 등단(2014년)

 

 한국문인협회 회원

 부산문인협회 전) 봉사차장

 부산시인협회 전) 편집차장

 새부산시인협회 전) 사무차장

 천성문인협회 명예회장

 

 시집:「 내 가슴에 머문 그대」, 「강아지풀」발간, 그 외 동인집 다수

 

 서울시 지하철 전국 시 공모 당선(2016)

 부산청옥문학협회 '작가상' 수상(2017년)

 제2회문학산책 전국문학현상 공모 '특별상' 수상(2019)

 

 천성문인협회 '천성문학상' 대상(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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